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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전의 그날 아침이 밝았다. 희뿌연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해발 671m의 태백레이싱파크엔 싸늘한 공기와 먹먹한 고요만이 맴돌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전원 아침의 고즈넉함. 하지만 그것도 잠깐. 예사롭지 않은 울부짖음과 더불어 푸르스름한 제논 불빛 여섯 가닥이 짙은 안개를 헤집는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정상급 수퍼카 세 대를 서킷에 모았다. 후보 차종을 정하는 과정은 녹록치 않았다. 욕심 같아선 체급 별로 몇 개의 리그를 열고 싶었지만, 국내 시장엔 니치 마켓을 위한 모델이 변변치 않았다. 그래서 쉽게 생각하기로 했다. 각 브랜드 최고의 스포츠카로 한정짓기로. 아울러 AWD 방식이란 공통분모를 전제로 내걸었다. 초청 리스트는 의의로 쉽게 완성됐다.

아우디는 R8 4.2 FSI 콰트로를 내세웠다. 올 상반기까지 수입이 예정된 물량까지 죄다 계약이 끝난, 인기 절정의 모델이다. 벤틀리는 콘티넨탈 GT 스피드를 준비했다. 벤틀리 역사상 처음으로 시속 300km의 벽을 넘어선 주인공이다. 포르쉐는 911 터보 카브리올레를 앞세웠다.  

이들의 조합은 역대 본지 테스트의 최고기록을 가뿐히 경신했다.

최고출력의 총합은 1천500마력, 배기량을 더하니 1만3천761cc다. 세 대를 한꺼번에 손에 넣으려면 7억2천250만 원이 필요하다. 최고속도는 예외 없이 시속 300km를 넘는다. 값으로 따지든 성능으로 견주든, 각 브랜드에서의 위상을 감안하든 이들이 수퍼카란 사실엔 논란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자연스레 이번 시승의 타이틀은 ‘수퍼 테스트’로 결정됐다. 우린 테스트의 방법을 두고 D데이 하루 전날까지 고민을 거듭했다. AWD 방식이란 점을 빼면 기통수·배기량·값·성능 등 어떤 기준을 들이댄들 맞대결의 명분이 서지 않아서였다. 결국 우린 랩타임과 0→시속 160km 가속, 시속 100→0km 제동 테스트로 각자의 성능을 가늠해보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야심찬 계획은 하룻밤 사이 전면 수정됐다. 시승 당일, 서킷의 직선로에 여전히 얼음 띠가 남아 있던 까닭이었다. 계측을 위해 전력 질주하는 건 모험이요 도박이었다. 설령 강행한다한들 수긍할 만한 객관적 수치를 얻기 어려워보였다. 아쉽지만 계측은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대신 슬라럼과 서킷 주행으로 각각의 특성과 매력을 가늠해보기로 했다.

 
 

아우디 R8 4.2 FSI 콰트로

R8은 아우디의 영광스러운 과거가 투영된 거울과 같은 존재다. 르망 24시간 내구레이스에서 다섯 차례 우승한 경주차의 이름을 따왔다. 디자인은 ‘아름다운 아우디’의 신호탄인 아부스 콰트로에서 로제마이어, 르망 콰트로로 이어진 모티프를 다듬어 완성했다. R8엔 1930년대 유럽의 레이스를 휩쓴, 아우토우니온의 영광을 알리고픈 아우디의 욕망이 넘실댄다.

아우디 R8의 디자인은 2003년의 컨셉트카 르망 콰트로와 판박이. 하지만 여전히 세련됐다. “지나치게 검증된 디자인의 조합”이라든지, “도어 뒤쪽의 패널이 어색하다”는 의견도 들려온다. 넓적하고 납작한 실루엣은 누가 봐도 수퍼카다. 뒷유리 아래 훤히 드러난 엔진은 그 자체가 하나의 액세서리다. R8은 어딜 가든 호기심 어린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빼어난 감성품질의 뿌리를 이룬 아우디의 병적인 완벽주의는 R8에도 예외 없이 녹아들었다. 바늘 한 땀, 스위치 하나에서도 정성과 고집이 느껴진다. 상식적인 수준을 넘지 않은 겉모습과 달리 인테리어는 3차원적 조형미를 곁들이는 등 그동안 아우디에서 볼 수 없었던 ‘파격’이 횡행한다. 시트 바닥이 땅바닥과 손 한 뼘 차이지만, 운전 자세엔 위화감이 없다.

등에 들쳐 업은 엔진은 V8 4.2ℓFSI. 7천800rpm에서 최고출력 420마력, 4천500~6천rpm에서 최대토크 43.8kg·m를 뿜는다. V10도 곧 선보일 계획이다. 변속기는 람보르기니 가야르도의 E-기어와 같은 6단 시퀀셜 매뉴얼, R 트로닉. 수동 기반이어서 클리핑이 없고, 업시프트 때 멈칫거릴 뿐 아니라 주차할 때 1단에 넣어야하는 등 처음엔 다소 낯설다.

아우디 R8의 구동계는 풀타임 네바퀴굴림 방식이다. 아우디는 R8에 이전의 토센 방식 대신 비스커스 커플링 방식의 콰트로 시스템을 얹었다. 시스템은 상황에 따라 앞 차축에 구동력을 10~35% 넘겨준다. 알루미늄 차체 ASF를 써서 앞뒤 44:56의 무게배분을 이끌어낸 R8은 아우디의 어떤 모델보다 콰트로 시스템과의 궁합이 좋다.

성능은 ‘아우디 최초의 수퍼카’란 타이틀이나 시선을 잡아끄는 스타일이 전혀 부끄럽지 않을 수준. 정지 상태에서 단 4.6초 만에 시속 100km까지 가속한다. 최고속도는 시속 301km. 하지만 차체의 거동에 워낙 빈틈이 없어 체험 성능은 되레 수치가 불러일으키는 환상에 못 미친다. ‘막운전’으로 채근해도 어지간해선 가슴 철렁한 순간을 경험하기 어렵다.

아우디 R8은 국내에서나 해외에서나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없어서 못 파는 형편이다. 지금 당장 계약을 해도 최소 몇 개월은 기다려야 한단다. 값은 1억8천850만 원이다. 외지의 비교시승에서 단골로 맞붙는 라이벌은 포르쉐 911 시리즈. 국내 판매 값을 잣대로 삼으면 911 카레라 4S가 물망에 오르는데, 출력이나 스타일을 감안하면 R8이 유리해 보인다.
 

 
 

벤틀리 콘티넨탈 GT 스피드

벤틀리는 1919년 월터 오웬 벤틀리가 영국에서 창업한 고급차 메이커다. 1931년 롤스로이스에 흡수된 이후에도 꾸준히 사랑받았지만, 모기업의 그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1998년 폭스바겐에 인수된 뒤 내놓은 콘티넨탈 시리즈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벤틀리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 국내에서의 인기도 뜨거워서 출시 한 돌 만에 호주의 성적을 따라잡았다.

콘티넨탈 GT 스피드의 디자인은 더없이 벤틀리답다. 네 개의 원형 헤드램프를 제외한 모든 구멍에 반짝이는 매시 그릴을 덧씌워 자칫 밋밋해 보일 수 있는 얼굴에 공격적인 분위기를 불어넣었다. 사이드 보디는 여러 개의 캐릭터 라인을 스며 넣어 생동감을 살렸다. 부드럽게 둥글린 뒷모습은 점잖으면서도 스포티하다. 다소 뚱뚱해 보인다는 평도 있다.

인테리어는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크롬과 원목, 가죽을 요소요소에 적당히 섞어 호화 요트에 들어선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시트 가운데 부분과 도어 트림엔 그릴의 분위기를 이은 격자무늬 스티치를 넣어 스포티한 이미지를 강조했다. 실내 공간은 진정한 2+2. 쿠페지만 대형 세단 같다. 뒷좌석이 이 정도로 넓고 안락할지 미처 예상 못했다.

보닛 여는 레버를 당기면 벤틀리 엠블럼 가운데 박힌 ‘B’가 ‘퐁’ 올라온다. ‘B’를 쭉 잡아 뽑으면 거대한 보닛이 거짓말처럼 번쩍 들린다. 그 속을 꽉 채운 엔진은 W12 6.0ℓ트윈터보. 6천rpm에서 최고출력 600마력, 1천750rpm에서 최대토크 76.4kg·m를 쏟아낸다. 변속기는 ZF제 자동 6단. 스티어링 휠의 패들로도 변속할 수 있다.

벤틀리 콘티넨탈 GT 스피드의 구동계는 토센 방식의 센터 디퍼렌셜과 앞뒤 액슬에 디퍼렌셜로 구성된다. 뼈대를 나눠 쓴 폭스바겐 페이톤과 판박이다. 평소 앞뒤 구동력을 50:50으로 나눈다. 타이어가 1%만 헛돌아도 바로 감지해서 앞뒤 구동력 배분을 다시 조율한다. GT 스피드의 ESP엔 휠 스핀을 적당히 허용하는 ‘다이내믹 모드’를 달았다.

콘티넨탈 GT 스피드의 성능은 지금까지 벤틀리가 내놓은 양산차 가운데 가장 강력하다. 가속 성능은 600마력이 주는 환상과 고스란히 겹친다. 0→시속 100km 가속을 4.5초 만에 마친다. 시속 50km로 정속주행하다 시속 80km까지 가속하는 데는 1.7초면 충분하다. 최고속도는 무려 시속 326km에 달한다. 벤틀리의 제왕이라 할 만하다.  

몸값 또한 벤틀리의 제왕. 국내 판매값은 3억 원에서 딱 100만 원 빠진 2억9천900만 원. 메르세데스-벤츠의 호화 쿠페, CL 시리즈의 꼭짓점인 CL 63 AMG보다도 9천만 원이나 비싸다. 국내엔 12기통 엔진을 얹은 쿠페가 없으니 마땅히 세울 라이벌도 없는 셈이다. 그렇다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페라리, 람보르기니와 견주기도 멋쩍다. 독보적인 존재인 셈이다.
 

 
 

포르쉐 911 터보 카브리올레

누구나 포르쉐를 탈 수는 없지만, 누구나 포르쉐를 안다. 911은 스포츠카의 대명사인 포르쉐의 혼과 같은 존재다. 1960년 처음 선보인 이후 오늘날에 이르도록 RR 구조와 수평대향 엔진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 911 터보 카브리올레는 코드네임 997로 거듭나면서 다시 한 번 성능의 한계를 뛰어넘어, 이태리 수퍼카의 자존심을 박박 긁어놓았다.

40년 전의 포르쉐나 지금의 포르쉐나 그림자를 겹치면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그만큼 유행에 휘둘리지 않은 채 고유의 스타일을 지켜왔다는 얘기다. 코드네임 996과 997을 거치며 나름 많은 변화를 담았지만, 여전히 911은 911이다. 골수팬이야 늘 감사하는 마음뿐이겠지만, 신선하고 자극적인 디자인을 원하는 이에겐 다소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 있겠다.

인테리어는 911의 최대 약점이었다. 코드네임 993까지 멋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996에서 변신에 성공했고, 997에선 더 욕심을 냈다. 하지만 뒤늦게 화장을 배운 여대생처럼, 뭔가를 보여주고픈 의욕이 스위치 개수로 승화된 듯해 아쉽다. 시속 200km를 넘나드는 속도에서 눈대중으로 더듬어 쓰기란 여의치 않다. 운전 자세는 100점을 줘도 아깝지 않다.

911 터보 카브리올레의 엔진은 수평대향 6기통 3.2ℓ 트윈터보. 최고출력은 6천rpm에서 480마력, 최대토크는 1천 950∼5천rpm에서 63.2kg·m. 블록과 헤드를 알루미늄으로 만들었고, 터빈 한 개마다 인터쿨러를 달았다. 아울러 터보 랙을 줄여줄 가변 지오메트리 터빈(VTG)와 포르쉐가 자랑해마지 않는 가변밸브타이밍 기구, 바리오캠 플러스를 더했다. 변속기는 아이신제 자동 6단이다.

911 시리즈의 최강 모델은 터보가 아닌 GT2다. 같은 엔진을 쓰는 두 모델의 가장 큰 차이점을 굴림방식. GT2는 터보에서 AWD 시스템을 덜어내 무게를 줄였다. 한편, 911 터보는 RR 구조상 차체 뒤쪽의 변속기에서 뻗어 나온 샤프트가 앞쪽에 구동력을 배분한다. 참고로 비스커스 커플링을 쓰는 카레라 4와 달리 터보는 다판 클러치를 쓴다.

정상의 자리는 살얼음판이 따로 없다. 스스로를 끊임없이 채찍질하지 않으면 언제 밀려날지 모르는 까닭이다. 997 베이스의 911 터보 카브리올레는 다시 한 번 스스로의 한계를 깼다. 0→시속 100km 가속을 불과 3.8초 만에 마친다. 최고속도는 시속 310km. 이 정도면 거의 레이스카 수준이다. 그러면서도 운전이 불편하지 않아 매일 탈 수 있다. 포르쉐의 경쟁력은 이런 데 있다.

포르쉐 911 터보 카브리올레의 값은 2억3천500만 원. 람보르기니의 엔트리급 모델, 가야르도보다 6천900만 원 저렴한 값에 AWD 방식 포르쉐의 최고성능 모델을 살 수 있는 셈이다. 어쩌면 이번 911 터보는 수평대향 6기통 엔진을 얹은 마지막 모델일는지 모른다. 더 이상 성능을 쥐어짤 수 없어 이제 수평대향 8기통으로 진화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기 때문이다.
 

 
 
 

피트에서 촬영을 마치고 나니, 시간은 이미 정오를 넘어섰다. 서킷 직선로엔 햇볕이 드리웠지만, 날씨가 워낙 추워서 노면 상황엔 변화가 없었다. 오전에 결정한 시나리오대로 가기로 했다. 싸늘히 식은 수퍼카의 네 발을 정성껏 비벼줄 순서가 온 거다. 추위에 떨며 이 순간을 기다렸던 시승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패독 옆 트랙에 파일런을 가지런히 세운다.

도움닫기 구간은 넉넉지 않았다. 그러나 세 대 모두 성능이 출중해 문제될 건 없었다. 애당초 진입속도는 큰 의미가 없기도 했다. 세 대의 시승차가 꽁무니에 연기를 폴폴 피워대며 늘어섰다. 각 기자 별로 돌아가면서 한 대씩 자유롭게 타보기로 했다. 신경을 잔뜩 곤두세워야 하는 계측을 포기하고 나니, 마음만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스티어링 무겁되 몸놀림 가벼운 R8

나의 첫 번째 파트너는 아우디 R8. 11월호 로드테스트 때 서킷은 실컷 달려봤지만, 슬라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R8에 우아하게 타고 내리기란 쉽지 않다. 기예단 수준의 노하우가 필요한 로터스 엑시지 만큼은 아니지만, 입사각도 잘 조준해야하고 바깥에 디딘 다리도 적당한 타이밍에 추슬러야 한다. 워낙 시선을 끄는 차다 보니 이런 것까지 다 신경이 쓰인다.

변속기를 자동 모드 1단으로 옮긴 뒤, 출발선으로 이동했다. 코스와 일직선상에 차를 세우고 나니 파일런의 간격을 좀처럼 짐작하기 어려웠다. 일단 뛰어들어 보기로 했다. 풀 드로틀로 속도를 높였다. 속도계 바늘이 시속 80km 지점을 지날 때쯤 가속페달을 떼어 탄력으로 첫 번째 파일런 옆을 파고들었다. 기어는 벌써 잽싸게 2단을 물었다.

두 번째 파일런을 감아 돌기 위해 스티어링 휠을 감아 채는 순간 팔뚝에 힘이 들어간다. 스티어링의 답력에 굴곡이 있다. 콰트로 시스템의 아우디에서 익히 경험했던 현상이다. 앞머리의 움직임은 민첩하고 정확했다. 여기에 차분하게 토크의 수위를 높여가는 자연흡기 엔진이 어울렸으니, 결연한 의지로 도전해야할 슬라럼이 범퍼카 타는 것 마냥 즐거웠다.

몇 번을 시도한 결과 아우디 R8은 스티어링 감각은 다소 뻣뻣할지언정, 몸놀림만큼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어찌나 움직임이 날카로운지, 파일런 사이로 진입하면서 두 번 정도 궤도를 수정할 여유마저 있었다. 아우디 R8은 마지막 파일런을 시속 78km로 통과했다. 타이어는 비명 한 번 제대로 지르지 않은 채 묵묵히 온도만 높였다.

 

R8만큼 예리한 911, 고개 숙인 벤틀리

두 번째 파트너는 포르쉐 911 터보 카브리올레. 정지 상태에서의 스티어링 답력은 R8보다 약간 가벼웠다. 변속기를 자동 모드에 놓고, 출발선에 섰다. 997 베이스의 911 터보는 처음이어서 적잖이 설레었다. 뻑뻑한 가속페달을 밟는 순간, 목덜미가 뻣뻣해진다. 가속 G가 장난이 아니다. 소스라치게 놀라 오른발을 뗐을 때 속도는 이미 시속 90km를 넘었다.

911 터보는 아우디 R8과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만큼 빠르고, 정밀하게 파일런 사이를 누볐다. 스티어링 감각은 R8보다 훨씬 매끄러웠다. 답력의 수위도 적당하거니와 굴곡 없이 미끈해 두 손이 한결 자유로웠다. 나아가 RR 방식의 911보다 확실히 안정적이다. 앞바퀴로 끊임없이 전달되는 구동력이 손끝으로 느껴진다. 마지막 파일런은 시속 76km로 지났다.

벤틀리에 올랐다. 오랜만에 앉는 오른쪽 운전석. 중앙선 없는 서킷이니 별 상관없건만,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떨칠 수 없다. 출발점까지 잠깐 이동하는 사이, 부드러운 서스펜션을 엉덩이가 먼저 알아챈다. 예상대로 콘티넨탈 GT 스피드는 앞서 두 괴물과 느낌이 너무 달랐다. 무겁고 부드러우니 롤이 심했고, 궤적은 점점 흐트러졌다. 시속 62km가 한계였다.

구간가속을 반복하는 슬라럼 테스트에서 으뜸은 아우디 R8이었다. 낮은 무게중심과 날렵한 움직임 덕분에 가장 빨랐다. 포르쉐 911 터보 카브리올레는 스티어링 감각은 R8보다 한 수 위지만, 터보 엔진의 다혈질적인 반응 때문에 가속페달 요리에 신경 쓰느라 기록이 살짝 쳐졌다. 스킬이 부족한 탓일 수도 있다. 벤틀리는 슬라럼에서 이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은근히 경쟁 심리를 부추겼던 슬라럼이 끝났다. 이제 서킷에 들어설 차례. 피트의 서킷 쪽 입구가 열렸다. 직선로 군데군데 깔린 얼음 때문에 다들 신경이 쓰이는 눈치. 안전을 거듭 강조한 뒤 시승 준비에 들어갔다. 911을 몰고 온 스투트가르트 스포츠카의 이재원 부장과 GT 스피드를 끌고 온 벤틀리코리아의 데이빗 지사장도 레이싱 슈즈의 끈을 동여맸다.  

서킷 노면은 직선로 일부 구간만 빼곤 거의 다 말랐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러나 헤어핀이 버티고 선 직선로 끝자락이 얼어있어 전력질주는 여전히 불가능했다. 선수끼리 긴 말은 필요 없었다. 알아서 조심하기로 했다. 이 부장과 데이빗 지사장은 아까부터 R8에 눈독을 들이는 눈치. 잘 됐다 싶어 주인을 잃고 홀로 서있던 벤틀리에 올랐다.
 

 

상식을 뛰어넘는 폭력적인 가속 성능

이거 완전히 대포알이다. 콘티넨탈 GT 스피드가 W12기통 트윈터보를 울려대며 달려 나갈 때의 느낌은 흡사 제트 엔진을 단 탱크와 같았다. 제원 가속 성능이 앞서는 포르쉐 911 터보 카브리올레도 긴 직선로에선 GT 스피드와의 간격을 좁히지 못했다. 현란한 인테리어 속에 파묻혀서 아스팔트가 맹렬히 빨려 들어오는 장면을 지켜보는 기분이 압권이다.

하지만 GT 스피드는 서킷에서 역시 롤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최대한 부드럽게 코너를 돈 뒤 다음 코너까지의 직선로를 가늠해 대포 쏘듯 펑펑 달리는 게 최선이었다. 치밀하게 라인을 수정해 가며 기록을 야금야금 단축하는 것도 즐겁지만, 엄청난 파워를 등에 업고 조그셔틀 다이얼로 동영상 보듯 가속의 템포를 조절하는 벤틀리식 주행도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이번엔 포르쉐 911 터보 카브리올레에 올랐다. 이태리의 수퍼카를 무릎 꿇렸다는 성능은 허수가 아니었다. 콘티넨탈 GT 스피드의 순간 가속이 대포알 같이 나갔다면, 911 터보 카브리올레는 미사일 같다. 등을 있는 힘껏 발로 채인 것처럼 무지막지하게 튕겨나간다. 핸들링은 스티어링 휠의 움직임을 1mm까지 놓치지 않고 반영할 만큼 정교해 감탄을 자아냈다.

사실 난 포르쉐 911에 약간의 공포증이 있었다. 비오는 날 아우토반에서 911을 몰다 가슴이 철렁했던 경험이 있어서였다. 무게중심이 꽁무니에 쏠린 구조상, 코너에서 뒤쪽이 주저앉아 어깨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달리는 느낌은 911 터보 카브리올레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앞바퀴가 악착같이 아스팔트를 박차 RR 방식의 911 카레라보다 훨씬 안정적이었다.

 

각 차종마다 서로 다른 매력 뽐내

아우디 R8은 두 달 전과 마찬가지로 어떤 라인, 어떤 속도로 코너에 던져 넣든 자석으로 붙여 놓은 듯 아스팔트를 되알지게 움켜쥐고 달렸다. 출력, 토크, 가속 성능 모든 제원 수치가 GT 스피드와 911 터보 카브리올레를 앞서진 못하지만, 태백레이싱파크로 제한된 환경에서만큼은 차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막상막하의 실력을 뽐냈다.

서킷에서 달리면 달릴수록 세 차종의 차이는 확연히 드러났다. 벤틀리는 초호화 GT가 지향해야할 모범답안과도 같았다. 호화로운 실내에 느긋하게 앉아 끊임없이 샘솟는 파워를 펑펑 뿌려대다 보니, 백 분의 1초를 앞서겠다고 악다구니를 쓰는 경쟁이 문득 하찮고 덧없어 보였다. ‘있는 자의 여유’란 어떤 심리상태인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포르쉐 911 터보 카브리올레와 아우디 R8 4.2 FSI 콰트로는 벤틀리와 달리 치열한 접전을 펼치는 게 어울리는 과. 미묘한 차이긴 하지만, 롤링과 피칭으로 인한 무게중심의 이동은 아우디 R8 쪽이 훨씬 억제되었다. 당연히 실수의 여지도 적었다. 그건 그만큼 운전자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여지가 많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번 수퍼테스트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건 포르쉐 911 터보 카브리올레였다. 초정밀 핸들링, 묵직하되 부드러운 스티어링, 핵폭탄급 가속 성능은 지금 이 시대에 경험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날 감동시킨 건, 운전자가 참견할 여지를 적당히 남길 줄 아는 포르쉐의 지혜였다.
 

 
출처 : 다나와&스트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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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카앤드라이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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